이소룡 절권도 1대 직계 제자

황금명 (Ted Wong )

"난 브루스리를 1967년도에 L.A.의 차이나타운에서 처음 만났다. 물론 나는 서로 만나기 이전에도 티비를 통하여 그린호넷의 ‘카토’ 역으로 브루스리를 알고 있었다. 이 ‘카토’라는 캐릭터는 고양이와도 같았다 – 빠르고 우아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는 그 프로의 주인공보다도 훨씬 강한 인상을 풍겼다. 서양 문화에 전체에 걸쳐서 그 어떤 아시안 캐릭터도 리가 ‘카토’역으로 풍겼던 것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었다 – 터프하고, 쿨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그런 모습. 이것이  최초의 아시안 슈퍼스타라는 그의 아이콘적인 명성의 시작이었다. 요즘 시대에는 그가 얼마나 유니크했는지를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요새는 유행과 문화 전반에 걸쳐서 어딜가도 무술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40년 전에는 오직 한명, 브루스리 혼자였다. 영화 산업에 있어서 그 어떤 사람의 육체도 멋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영상 기술의 발전이나 이연걸, 주성치, 성룡과 같은 아시안 스타들을 감안하고서래도 – 브루스리는 아직도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미지와 스타일은 아직도 강렬한 효과를 주면서 울려 퍼지고 있다.

 

 브루스리가 나한테 처음으로 말을 걸은 것은 두 번째 수업을 할 때였는데, 그는 나에게 “누구시죠?”라고 물었다. 왜냐하면 내 지원서에 조금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설명을 한 뒤에, 우리는 중국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나서 서로 공감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브루스리가 모든 면에서 나와는 현저하게 다를 정도로 뛰어났다. 나는 마르고, 내성적인 청년이었다. 나는 무술을 수련해본 적이 없었다. 즉 그 때의 내 상태는 하얀 종이와도 같았는데, 아마도 이것이 나에게 가장 큰 재산이었던 것 같다. 실험에 “미친 과학자”처럼 리는 내 이해력을 배양하고 내 경험을 빚어 나갔다. 그가 나한테 실행한 첫 번째 작업은 덤벨을 사오라고 시킨 것이고, 육체적으로 강하게 만들기 위해 웨이트 계획을 짠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의 도관에서 수업을 듣다가 나중에 개인 레슨을 받게 되면서, 나는 리의 무술이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은 사람 중 한명이었다. 도관의 수업은 많은 수의 그룹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실용적이고 정형화되어 있었고, 변형된 중국 쿵푸의 교육 과정 범위 안에서 고안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리의 개인 수업과 비슷한 부분은 없었다. 개인 수업에서는 리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일종의 자유 형태를 가르치고, 그의 무술을 발전하는데 있어 실험적인 과정들을 가르쳤다. 갈수록 점점 더 그는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만족해했다. 도관의 커리큘럼이 시대에 뒤쳐지고 그의 작업과 연관성이 없다고 느낀 그는 도관을 없애버렸다. 그는 도관을 상업적인 벤처 기업으로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보다는 수련을 성취하는데 더 집중하였다.

 

 개인 강습에서 리는 그의 이론과 기술 보급에 있어 전적으로 스스로 감독을 하였다. 어떤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레벨의 레슨을 받았다. 또 그는 그가 알고 있던 것들 중에 어떤 것은 이 제자에게, 또 다른 어떤 것은 저 제자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 빠르게 진화하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정확성을 요구했고 학생들에게 의구심을 갖지 말고 따라와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설명을 거의 하지 않았고, 똑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주는 일에는 약간 인내심을 잃기도 했었다. 만약 제자가 빨리 캐치하지 못하면, 뒤쳐져 버리는 그런 양상이었다. 그가 그의 기술들을 설명하면서도 대부분의 메커니즘들은 그의 머릿속에 간직했는데, 항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비축해두는 것 같았다 – 그를 “master of art”로 만들어주는 그런 지식들을 말이다. 그는 “진리로 가는 열쇠”를 제자들이 그냥 쉽게 얻어가게끔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리의 메커니즘들은 육체적인 영역만큼이나 지식적인 영역에도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브루스리처럼 싸우고 싶으면, 일단 브루스리처럼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나는 그가 직접 가르친 정말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 트레이닝하고, 스파링하고, 7년 내내 같이 어울려 돌아다니고 말이다. 가까이서 듣고,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나는 절권도의 바탕이 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개념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리가 죽은지 15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그런 것들을 더 발견하기도 하였다. 절권도는 소수의 기술로 이루어져 있고 보여주기식이나 화려한 동작은 없다. 킥과 펀치들은 간결하고, 각 기능마다 부합하는 자세들로 정의할 수 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나는 그를 존경했고, 마음 속 깊이 그가 나한테 가르쳐 준 기술들에 대해서 고마워했다. 그가 죽은 이후로 나는 그를 존경을 넘어 예우해 왔다. 내가 레슨을 할 때마다 난 스스로에게 묻는다. “브루스가 이것을 허락해줄까?” 내가 문제와 부딪치면, 나는 묻는다. “그였다면 어떻게 이 상황을 접근했을까?”

 

 브루스리가 죽었을 때 모든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깊게 후회하고 있다. 그의 업적이 영속할 수 있게끔 서로의 지식을 모으고, 합일된 모습을 형성하는 그런 자리 말이다. 공유하고, 토론하고, 아마 논쟁이 붙기도 하고…… 그 때 당시에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거나 혹은 절권도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다. 그가 살아있을 땐 그의 인간성이 우리를 연결시켜 주었지만, 그가 죽은 뒤로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절권도에 대한 부정확한 주장들을 아주 많이 목격하였다. 몇몇은 샛길로 새거나 또 몇몇은 심지어 리의 의도와는 반대로 모순적이기도 하였다. 그의 유산이 자기 잇속만 차리는 사람들이나 왜곡된 관점에 의해서 흐트러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가슴이 아팠다. 적어도 내가 브루스리를 알던 그 시기 동안에는 브루스가 어떤 누군가와 콜라보레이션(동등한 위치에서 공동 작업)을 한다거나, 다른 무술의 이미 존재하는 어떤 요소를 그의 연습 기반으로 쓴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오늘날 나는 온갖 종류의 도관들과 온갖 종류의 강사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브루스리의 방법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 나는 그들의 어떤 부분도 브루스리로부터 왔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나는 내가 배운 것을 지키는데 바빴다. 난 생생하게 브루스리의 말과 동작들을 기억한다. 나는 한번도 광고를 하거나 도관을 세운 적이 없지만 30년 이상 개인 레슨 강사를 해왔다. 여러 나라에서 서로 다른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개인교습을 위해 나를 찾아왔다. 왜냐하면 내가 브루스리의 직계이기 때문이고 나는 그들에게 브루스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가르쳐준 것들의 에센스를 보여줘 왔다."